池萬元「水曜集会の元慰安婦女性は偽者」(2005) — 2015年5月31日

池萬元「水曜集会の元慰安婦女性は偽者」(2005)

「水曜集会の元慰安婦女性は偽者」 軍事評論家の随筆が波紋

軍事評論家の池萬元(チ・マンウォン)氏が、毎週水曜日、ソウル・鍾路(チョンノ)区の日本大使館前で行われている「水曜集会」に参加している元挺身隊の女性たちに対し“偽者”であると主張し、波紋を広げている。

池氏は今月13日と14日、自分のホームページに相次いで掲載した「慰安婦問題を解剖する(上・下)」という題名の随筆で、「日本の最高裁判所が確実に日本軍慰安婦だったと認めたシム・ミジャさんが認める“日本軍慰安婦だった女性”は33人で、この中、現在デモをしている女性は1人もいなかった」とし、「テレビでよく見かける女性の場合、日本の関連団体が“偽者”とし保証金の支給さえ拒絶している」と主張した。

池氏は慰安婦を「日本軍の慰安婦」、「従軍慰安婦」、「挺身隊」に区分した後、「本当に被害を受けた“日本軍慰安婦”は全体の20%程度で、貧しさのため自ら売春をした従軍慰安婦が80%程度におよぶと言われている」とした。

池氏は「慰安婦問題も以前の5・18民衆抗争(光州人民蜂起)のようにタブーになっている」とし、「このような事に限って問題が多いというのが筆者の持論」と主張した。

池氏は今後も「慰安婦問題の伏魔殿(陰謀や悪事が企まれている場所)」、「本物の日本軍慰安婦が申請した仮処分申請」、「大韓民国が恥ずかしい。慰安婦ゲーム、もう終わりにせよ」という題名で3回に渡って慰安婦関連の随筆を掲載する計画だ。

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は声明を発表、「挺身隊の女性たちの名誉棄損と人権侵害の責任を問い、法的対応をしていく考え」とした。

同協議会ホームページの掲示板には「最後まで(池氏の)言葉に対する責任を取らせるべき」など、池氏に対する厳しい対応を要求する書き込みが相次いだ。インターネットポータルサイトでも「あなたの母親が慰安婦だったとしてもそのような言葉を口にできるのか。長い歳月の間、恨みを胸に抱えて生きてきた女性たちにナイフを突き刺した」など非難の書き込みが殺到した。

チョ・ウイジュン記者 joyjune@chosun.com

朝鮮日報2005/04/14

http://megalodon.jp/2008-0317-1503-50/www.chosunonline.com/article/20050414000056

raw 池萬元の国民の叫び 挺対協が行う不純な慰安婦の遊び、中断させなければ —

raw 池萬元の国民の叫び 挺対協が行う不純な慰安婦の遊び、中断させなければ

오피니언
지만원의 국민의 함성

정대협이 벌이는 불순한 위안부 놀음, 중단시켜야
위안부 문제를 한미일 안보협력 체제를 깨기 위해 악용하고 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제1권 434-476쪽에는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의 소정희 교수의 귀한 논문이 실려 있다. 아래에 요지를 소개한다.

식민통치의 마지막 10년(1935-45)은 조선의 산업혁명 시기였다. 농민들은 토지로부터 추방되고, 노동계급이 태동하고, 인구의 유동성이 증대하고, 도시 사회가 폭넓게 확산되고, 여성계에서는 소위 신여성에 대한 선망이 확산됐던 그런 시기였다. 1917년 이광수의 소설 ‘무정’이 연재되었다. 이 소설은 신문명의 보급서였다. 서구의 신문명이 유입되고, 개화사상이 확산되고, 신청년과 신여성을 연애의 표상으로 삼은 신소설이었다. 1935년 심훈의 상록수는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농촌을 계몽하기 위한 계몽서였다. 당시의 농촌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고루하고 원시적이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위안부 역시 이러한 개화기 시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190명의 위안부를 조사했더니 88%에 해당하는 168명이 바로 탈농촌 시기인 1937-44년 사이에 위안부가 되었다. 도시를 흠모하는 일종의 골드러시가 한창이었던 시절에 가정을 뛰쳐나온 여식들이 인신매매단의 좋은 먹이감이 된 것이다. 181명의 위안부를 조사한 결과 그중 4분의 1 이상이 이미 가족과 떨어져 식모, 공장 노동자, 식당 및 기생집 접대부 등으로 일하고 있다가 위안부가 되었고, 66% 정도가 만주, 대만, 중국 등으로 이송되어 갔다.

위안부로 가게 된 경우는 가정을 이미 탈출해 있던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가정에서 부모나 오빠들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있던 어린 여식들이 폭력을 피해 달아났다가 곧장 인신매매단의 덫에 걸려들기도 했고, 배움의 신기루를 찾아 넓어진 세상으로 도망쳐 나온다는 것이 곧 인신매매단의 희생양이 되어 위안부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당시 인신매매단의 앞잡이는 대부분 조선인들이었고, 군대 위안부를 경영하는 사람들 속에는 조선인들도 꽤 있었다.

위안부로 가는 길은 두 가지 경로였다. 가정-노동시장-위안부업소로 가는 과정이 있었고, 곧바로 가정-위안부업소로 가는 과정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촉진한 매개체가 인신매매단이었으며, 인신매매단에 걸려들 수 있었던 환경은 곧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과 학대 그리고 배움에 대한 선망을 무조건 억압하는 무지몽매한 조선 가정의 여성비하 문화 때문이었다. 소정희 교수는 가정에서 곧바로 위안부라는 구덩이로 떨어진 한 많은 위안부 6명의 케이스를 정대협 자료에서 쉽게 찾아냈다. 이러함에도 정대협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위안부 문제를 정치 문제로 부각시키기 위해 사회에 그릇된 인식을 확산시켰다.

정신대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위안부는 가정에 있던 조신한 여식들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일본 순사들이 들이닥쳐 강제로 붙잡아다가 일본군이 운영하는 유곽에 집어 넣었다는 것이다. 소정희 교수에 의하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소정희 교수가 조사한 6명의 위안부 사례는 이를 이해하는데 생생한 자료가 된다. 이하 소정희 교수의 사례를 요약 소개한다.

조선의 부모가 딸들을 위안부로 내몬 대표적 사례

1) 문필기 : 정대협이 매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주최하는 시위에 늘 참가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18세가 되던 해인 1943년 후반부터 2년 동안 만주의 군위안소에서 일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평양-개성-서울을 거쳐 고향으로 갔지만, 이내 고향을 떠나 진주-목포-광주-전주를 떠돌며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1925년, 경남 진양군에서 2남 9녀를 둔 구멍가게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것이 공부였다. 아버지는 “가시내가 공부하면 여우 밖에 될게 없다”며 화를 냈다. 어머니가 몰래 쌀 한 말을 팔아 보통학교에 넣어주었다. 일주일 안 돼서 아버지가 딸을 교실에서 끌어내고 책을 불태워 버렸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딸을 죽어라 패고 집에서 쫓아내 버렸다. 큰 집에 가 있다가 다시는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된 상태에서 9살부터 집에서 살림하고, 밭일도 하고, 목화밭을 매고, 물레질도 했다. 구멍가게에서 파는 고구마도 쪘다. 농사일을 할 때마다 밥을 해서 들로 날랐다. 그러던 1943년 가을 어느 날, 마을에 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는 50대 아저씨가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겠다 해서 따라 나섰다. 18세 였다. 그 남자와 일본인 순사가 그녀를 곧장 차에 태워 부산으로 데려갔다. 긴 머리를 자르고 치마저고리를 벗기고 원피스를 입혔다. 그리고 다른 네 명의 여인들과 함께 곧장 만주로 이송됐다. 이 이야기를 포함해 아래의 모든 이야기들은 정대협이 엮은 ‘증언집’에 수록돼 있다.

이 여인이 매주 수요일 12시에 일본대사관 앞에 나와, 일본이 자기를 강제로 연행해 가서 위안부로 삼았다며 사죄와 피해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위안부 놀음은 간첩의 처이자 정대협의 상임대표인 윤미향이 꾸려가고 있다. 문제는 이 여인에 있는 게 아니라 정대협에 있다.

2) 이상옥 : 이 위안부의 아버지는 경상북도 달성군 달성면 면장이었다.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짓는 부농이기도 했다. 9살에 학교에 들어갔지만 오빠가 “계집애를 학교에 보내서 어디다 쓰느냐”며 학교를 못 가게 하고, 책을 아궁이에 넣어 태워 버렸다. 그래도 학교에 가려 하자 죽인다고 협박했다. 옆집 언니가 학교에 다니는 게 너무 부러운 나머지 그해 어머니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울로 도망갔다.

고모가 학교를 보내주었지만 오빠가 고모에게 집요한 압력을 넣었다. 고모집을 나와 소리개라는 집에 들어갔다. 9명의 처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그들의 아버지에 의해 팔려왔다고 했다. 15세인 그녀가 가장 어렸다. 이 여인들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 보니, 시모노세끼 였다. 그들을 인솔한 군속이 열 명의 처녀들을 넘긴 곳은 바로 조선인 부부가 운영하는 군 유곽이었다. 그들은 이들 처녀들과는 아무 관계없이 돈을 주고 받았다. 이 여인은 일본말을 한다는 것 때문에 일본 군병원에 일하면서 봉급도 받았다. 일본 군의관이 그녀를 가엽게 여겨 조선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그날 폭격을 맞아 허사가 됐다. 이 여인 역시 여성에 대한 가정 폭력으로 인해 유곽으로 떠밀린 케이스 였다.

3) 이득남 : 이 위안부는 1918년생이다. 그녀는 1939년부터 3년은 중국에서, 또 다른 3년은 수마트라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주정꾼이자 노름꾼으로 이유 없이 마구 때렸다. “집에 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17세에 시집을 가라 했지만 그녀는 이를 팔려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웃 친구와 함께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을 찾기 위해 기차를 타고 인천 방직공장으로 갔다. 그게 위안부로 가는 길이었다.

4) 김옥실 : 이 위안부는 1926년 평양시내에서 10리 되는 촌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김은례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공부하려는 딸에게 가혹한 매질을 했다. 11세 때, 동네친구 하나가 한글도 가르쳐주고 노래도 배워준다는 데가 있다 해서 같이 가서 며칠 있다가 아버지에 들통이 났다.

“에미나이 세끼가 글 배워서 어디에 쓰갔네, 연애편지질이나 하려구 그러나!” 매를 든 아버지가 무서워 할머니 뒤에 숨었지만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린다며 때렸다. 그 후 아버지가 보기 싫어 집을 나왔다. 하루는 아주머니들로부터 평양에서는 기생이 최고라는 말을 들었다. 고운 옷 입고, 고운 가마 타고 다닌다는 기생이 되고 싶어 기생집으로 가서 양녀가 됐다. 불과 일주일 만에 아버지에 들켰다. “이 에미나이가 조상 망신, 동네 망신은 다 시키고 돌아 다닌다”며 매를 맞고 집으로 압송돼 왔다. 다시 양말공장으로 뛰쳐 나갔다. 거기에서 3년, 담배공장에서 4년 일하다가 드디어 인신매매 단에 걸려들었다.

5) 배족간 : 이 위안부는 1922년생이다. 이 여인은 자살까지도 기도했을 정도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광목공장에서 일하게 해주겠다는 동네 구장의 거짓말에 속아 집을 나간 것이 곧 중국행이 되었다. 중국의 여러 위안소들을 떠돌았다. 1946년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냉담했다. 어머니가 임종할 때 딸을 찾았지만 그녀는 가지 않았다.

6) 송신도 : 이 위안부는 1922년 생으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16세 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수많은 잡직들을 전전하다가 좋은 직장 구해주겠다는 이웃의 꼬임에 빠져 중국으로 갔다가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일본인 병사가 결혼하자고 하여 일본으로 동행했지만, 그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버렸다.

정치 목적을 위해 위안부 악용하는 정대협

이 6개의 사례들은 극히 일부의 것에 지나지 않지만 당시의 조선의 사회상을 잘 비추어준다. 이들을 비극적인 나락으로 내 몬 것은 일본 순사가 아니라, 그녀들을 낳아준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빠들이었다. 당시 사회는 개화의 바람을 타고 있었다. 어린 처녀들은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과 가정에서의 폭력 사이에서 탈출을 선택했고, 그 탈출은 곧장 인신매매단으로의 진입을 의미했다.

이런 사정들을 놓고, “당시 조선 여인들은 모두 가정에 있었으며, 일본 순사들이 가정으로 쳐들어 와서 처녀들을 강제로 끌어갔다. 사과를 하고 보상을 하라” 이렇게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심미자의 경우처럼 일본 순사가 교실 등에서 강제로 끌어간 경우들도 있다. 하지만 심미자 할머니의 증언이나 위 사회상을 보면 대부분의 위안부는 가정폭력과 무지로부터 탈출했다가 인신매매단에 걸려든 여식들이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위 6개의 케이스는 모두 정대협이 작성한 증언록에 있는 내용들이다. 모든 사정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대협은 위안부들을 정치적 목적으로 거리에 내돌린다. 문필기는 매주 수요일마다 대사관 앞에서 “내 청춘을 보상하라”고 시위를 하지만 정대협이 엮은 ‘증언록’에 의하면 그녀는 일본에 요구할 것이 하나도 없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제1권 2부는 ‘식민지 하의 여성의 삶’ 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일본의 오사카산업대학 후지나가다케시 교수, 미 시카고대학 최경희 교수,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의 소정희 교수의 글이 방대한 분량의 논문으로 실려 있다.

이 세 편의 논문을 보면 우리 정대협의 주장들이 얼마나 허황된 것들인가를 낱낱이알 수 있다. 아울러 논문이 인용한 근거자료들을 보면 일본인들의 조사가 매우 많은 반면 한국인들의 조사가 매우 빈약하다. 국내 학자들은 이 분야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고, 정대협은 객관성이 결여된 감정적 주장을 해왔다. 때문에 이 분야를 연구하는 수많은 국제 학자들에게 망신스러운 결과만 초래했다는 것이 이들 자료에 시사돼 있다. 먼저 후지나가 다케시 교수의 글 ‘상하이의 일본군 위안소와 조선인’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군 위안소의 원조, 상해 위안소

1. 오키나와에 거주한 조선인 전 위안부의 증언을 기록한 르포르타주 등 십여 권의 책들이 일본에서 발행됐다. 위안부 문제가 일본에 충격을 준 것은 1991년 8월부터 위안부들이 잇따라 자기 존재를 밝히기 시작했고, 이어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한 소송들을 전개한 데서 태동했다. 자료상 확인된 바에 의하면 1932년 상해 위안소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며, 중일전쟁 개시 이후 이 지역에서의 위안부 수가 최대 규모였기 때문에 상해 위안소는 타 지역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상해 위안소 환경을 연구하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상해에는 개인적인 돈벌이를 위해 일본인 매춘여성(가라유키상)이 해외로 나간 가장 전형적인 케이스다.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은 1880년대부터 가라유키상에 대한 단속에 나섰다. 이는 공창제도의 도입을 의미했다. 공창제도의 설치 동기는 1)강간방지, 2)군의 사기앙양, 3)성병 예방, 4)방첩이었다.

당시 상해에서의 조선인 여성 실태는 이러했다. 상해에서 조선인 여성 댄서가 출현했다. 카페에서 일하는 여급도 출현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사창도 있었다. 이들은 신흥접객부로 어쩔 수 없이 매춘을 했다. 이러한 여성들은 불경기로 인해 점점 더 많이 상해로 모여들었다. 1936년 당시 상해에는 조선인 여성 댄서가 37명, 이들은 풍속을 혼란시켰다는 비난도 받았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음식점, 카페 등에서 일하는 조선인 여급은 48명,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밀매음을 하여 주인과 반반씩 나누었다. 이 무렵 상해에는 290명의 조선인 사창도 존재했다. 사창이란 공창으로 인정받지 못한 곳이었다.

만주사변(1931년 9월) 때 나타난 위안부는 기본적으로 매춘부 출신이며, 그 중에는 조선인 여성이 일부 포함돼 있었지만, 중일전쟁 중기인 1940년 무렵에는 조선일 여인을 강제로 데려다 위안부를 시킨 ‘성적 노예’들도 새롭게 출현했다. 중일전쟁이 전면화 된 이후 위안소가 대량으로 개설되는 시기에 위안소 경영자 중에 조선인 이름이 꽤 있었다.

일본군이 개설했던 위안부는 1)군직영위안소, 2)군이 감독-통제하는 군전용 위안소, 3)민간매춘소를 병사용으로 지정한 곳(민간, 군 공용), 4) 순수한 민간 전용 위안소(군이 다니더라도 그건 개인적인 일). 4번째 형 위안소는 일본군 위안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1932년 3.14자 상해 파견군 고급참모 오카베 나오자부로의 일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요즘 병사들이 여자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닌다는 추잡한 이야기를 듣는 일이 많다. 이는 피하기 어려운 일이므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시설을 만드는 것이 좋다고 판단…”

상해 파견군 참모부장 오카무라 야스지는 이렇게 회상했다.

“위안부 문제를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부끄럽지만 위안부 안의 창설자다. 쇼와 7년(1932)의 상하이 사변 때 두 세 건의 강간죄가 발생했으므로 파견군 참모부장이었던 나는 그곳 해군을 본떠 나가시키 현지사에게 요청하여 위안부단을 불러들였다. 그 후 강간죄가 완전히 그쳤기 때문에 기뻤다.”

1932년 당시 상해의 일본인의 풍속영업 현황은 다음과 같다. 요릿집 3개소, 음식점 72, 다방 13, 해군위안소 17, 구락부 2, 무도장 1, 예기 134, 무도녀 170, 작부 166.

상해 주재 일본인의 매춘 역사

“메이지 원년(1868년)부터 메이지 14-15년(1881-1882) 무렵까지 상해 주재 일본인 수는 10-100명이 고작이었으며, 1년에 평균 5-6명씩 증가했다. 대개 남자 3분 1, 여자 3분의 2였다. 여성의 6-7할은 외국인을 상대로 매춘을 했다. 이들이 일본 매춘의 선구자일지 모른다. 모리사키 가즈에저서 ‘가라유키상’은 메이지 15(1882)에 상해에 800명의 매춘부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일본 아가씨들이 금새 늘어난 상해에서는 영사관이 이를 국가의 수치로 간주하고 붙잡아 500-600명을 본국으로 송환했다. 그래도 여전히 200명 정도는 숨어 있었다.”

결 론

매춘의 역사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다 어두운 역사로 연속돼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1961년 5.16 혁명 이전까지 매춘은 불법으로 통제됐었다. 그래서 매춘은 은밀히 가정으로 스며들었고, 성폭행과 살인 등의 나쁜 형태로 확산돼 갔다. 이에 박정희의 최고회의는 공창제를 채택했다. 가정으로 파고들던 성범죄와 성병 등이 매우 효과적으로 개선됐다. 위 논문 일부를 보면 당시 일본도 도덕과 품위와 성적 수요를 놓고 많은 생각들을 했던 것으로 짐작되며, 당시 그들의 고민도 지금 현재에도 우리가 풀지 못한 채 끌어안고 있는 고민과 일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보자. 한국 사회는 아마도 세계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성적 풍기문란 공화국이다. 국가를 이끌고 나가는 자리들은 있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무능과 이기심으로 서로 물어 뜯는 일로 1년 365일을 보내고 있다. 이런 식으로 몇 년을 더 낭비하면 우리는 북한에 먹히고 말 것이다. 만일 지금 북한에 먹히면, 우리의 여성 국민들은 70여 년 전에 일본인들로부터 당한 고통과는 비교 조차 할 수 없는 비참한 취급을 받다가 생명마저 잃게 될 것이다.

옛날의 선조들이 못나서 강대국에 먹힌 것은 사실이다. 만일 일본에 먹히지 않고 중국이나 러시아에 먹혔다면 러시아의 위안부 처지나 중국의 위안부 처지는 일본의 위안부 처지보다 더 양호 했을까? 나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원망하기 보다는 못난 짓을 하다가 나라를 빼앗겼던 우리 선조를 원망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소정희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위안부는 무지몽매한 한국의 아버지와 오빠들의 학대가 낳은 산물이었다 할 것이다. 이런 성격의 문제를 가지고 침소봉대하고 왜곡하여 위안부 문제를 한-미-일 안보협력 체제를 깨기 위해 악용되고 있는 것은 하루라도 빨리 정지돼야 한다. 더구나 정대협 지휘부는 북한과 간첩에 깊이 연루돼 있는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지 아니한가. 당장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벌이는 수요집회부터 중단시켜야 할 것이다. 창피해 못 살겠다.

https://web.archive.org/web/20150528192957/http://www.newstow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7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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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w 国家元首が自ら反対 韓国の国力は弱くない(明治世界遺産) —

raw 国家元首が自ら反対 韓国の国力は弱くない(明治世界遺産)

‘대통령’까지 나선 절박한 韓…‘심의관’급으로 여유만만 日

韓, 국회의장·장관도 “반대”목청만
외교부선 “우리 국력 약하지 않다”자신

日, 한국 상대 진빼기… ‘도광양회’행보
밖으로 나가 위원국들 대상 로비전 전략
일본이 조선인 강제징용 시설 7곳을 포함한 23곳의 산업시설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한ㆍ일의 대응이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은 이 문제와 관련해 ‘필사적’인데 비해 일본은 여유로운 모습이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을 놓고 국가 원수가 직접 나서 반대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20일 박근혜 대통령은 방한 중인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접견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일본의 근대산업시설 세계유산 등재가 “국가 간 불필요한 분열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측의 우려를 전달한 국내 정치권 인사는 한 둘이 아니다. 같은 날 정의화 국회의장,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나경원 국회 외교통일위원장도 보코바 총장을 만난 자리에서 세계유산협약 정신을 강조하며 반대 목소리를 더했다. 보코바 총장이 세계유산 등록을 결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 정부의 입장을 국제 사회에 환기시킨다는 측면이다.

한국의 절박함은 지난 22일 오후 도쿄에서 열린 한일 양자회담 수석대표 선정에서도 드러났다.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들의 권유에 따라 우리 측의 제안으로 열린 이번 회담에서는 한국 측 최종문 유네스코 협력대표(차관보급), 일본 측 신미 준(新美潤) 일본 외무성 국제문화교류심의관(국장급)이 각각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외교부는 수석대표 급(級) 논란과 관련해 “회담에 누가 나오느냐 보다 어떠한 문제를 갖고 얼마나 진정성 있게 협의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회담을 앞두고 사안의 경중을 바라보는 양국의 시각이 반영됐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한국은 정당한 요구를 반영시키기 위해 결사적인 행보를 이어가겠다는 분위기다.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우리 국력이 약하지만은 않다”며 “인접국인 한국이 필사적으로 반대하는데 일본의 징용시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쉽게 통과될 리 없다”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이에 반해 일본이 조용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은 ‘도광양회(韜光養晦)’라는 분석이다. 국제사회의 경계심을 조용히 뜻한 바를 이루려는 속셈이라는 것이다.

일본은 이미 이코모스(ICOMOSㆍ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의 ‘등재 권고’라는 한 표를 따낸 바 있다.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는 자문기구인 이코모스의 평가를 토대로 세계유산 등재 여부를 심사하는데, 그 결정이 번복된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은 일본에게 ‘믿을 구석’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 일본은 한국을 상대하면서 진을 빼는 대신, 세계유산 등록을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들을 대상으로 로비전을 벌이겠다는 전략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8일 이후 내각부, 외무성, 문부과학성 등이 정무관과 부대신 6명을 10개국에 파견했다. 지난 17일에는 나카야마 야스히데(中山泰秀) 일본 외무 부(副)대신을 위원회의 부의장국인 자메이카로 보냈다.

이는 국내로 들어오는 인사들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우리와는 대비되는 외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최종 결정 여부가 정해지는 7월 초까지 일본의 ’밖으로’ 외교에 맞서는 한국의 ‘결사적’ 외교가 순항할 지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한편 ‘아베 정부’의 극우 행보와 관련 일본 내에서 규모와 영향력이 큰 역사학연구회 등 6개 역사 연구ㆍ교육 관련 단체는 25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왜곡 중단을 촉구하는 성명을 일본어와 영어로 발표했다.

이들 단체는 이날 중의원 제2의원회관에서 발표한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의 역사학회ㆍ역사교육자단체의 성명’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강제연행된 위안부의 존재는 그간의 많은 사료와 연구에 의해서 실증돼 왔다”고 밝혔다.

이들 단체는 인도네시아 스마랑ㆍ중국 산시(山西)성에서 확인됐고, 한반도에서 다수의 증언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억지로 데리고 간 사례’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의사에 반한 연행 사례가 모두 강제 연행에 포함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지난해 아사히신문이 ‘전쟁 때 제주도에서 여성을 강제로 연행했다’는 일본인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사망)의 발언에 관한 기사를 취소한 것이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담화의 근거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고 평가했다.

http://megalodon.jp/2015-0531-1925-32/biz.heraldcorp.com/view.php?ud=20150526000452

https://web.archive.org/web/20150531102543/http://biz.heraldcorp.com/view.php?ud=20150526000452

鈴木に対する処罰は (第5種補給品テロ) — 2015年5月24日

鈴木に対する処罰は (第5種補給品テロ)

19日、京畿広州の‘ナヌムの家’に日本人、鈴木信行が送った郵便物が配達された。箱の中には
日本語で‘第5種補給品’と書かれた句とともにゆがんだ表情で膝の下がない少女像の模型が透
明プラスチックの円筒に入っていた。‘第5種補給品’とは軍人を相手にする売春女性を意味する
用語だ。この箱には‘竹島は日本固有の領土’と書かれた杭の模型(高さ9センチ)も一緒に入って
いた。
(中略:過去の経緯と鈴木氏の紹介)

■鈴木に対する処罰は
鈴木は2012年6月ソウルの駐韓日本大使館前に設置された慰安婦少女像にいわゆる’竹島杭’
を縛って慰安婦冒とく発言をし、慰安婦ハルモニらの名誉を傷つけた容疑で2013年2月、不拘束
起訴された。しかし、6度の裁判に一度も出席せず、それに対し裁判所が昨年6月30日、拘束令
状を発行して検察に指名手配を依頼した。発行された拘束令状の有効期間は翌月30日までだ。

当時、裁判を担当したソウル中央地方法院刑事1単独、アン・ホボン部長判事は「鈴木は二度に
わたって控訴状と召喚状の送達を受けたが、裁判に6回も欠席した。鈴木のこういう態度を見れ
ば自発的に出席する意思はないと判断される」と令状発行理由を明らかにした。

引き続き「送達を2回もしたのに欠席した被告人に強制処分をしなければ、被告人が大韓民国の
刑事裁判を無視したり忘却しかねない。拘束令状発行は今後、鈴木の大韓民国入国時裁判出席
を担保するための手段にできるだろう」と説明した。

法曹界ではハルモニが今回も鈴木を告訴したが、それに対する身柄確保が現実的に容易ではな
く直接的な処罰は不可能だと見ている。現在、唯一の方法は去る2002年、韓国と日本が犯罪者
引渡条約を締結しているので日本政府が鈴木の身柄を韓国に渡せば良いが、日本政府が応じる
可能性はゼロに近い。杭テロ以後、鈴木が韓国に入ってきたことは一度もなく、現在は日本政府
の決断がなければ彼を韓国法廷にたたせることは難しいと見られる。

前回の告訴後、韓国の法務部は裁判所に送った召喚状など書類を両国外交ラインを経て日本法
務省と鈴木に伝達したし、その後、送達報告書を通じて鈴木が控訴状、召喚状などを受けとったこ
とを確認した。

しかし、毎度‘送達不能’を理由に公判が延期になり、法曹界では結局、日本の司法当局が送達
報告書を送らないなど鈴木を保護していると見ている。国会関係者は「日本の右傾化がひどくなっ
て、日本当局が犯罪人引き渡しを拒否していると見られる。韓国政府は鈴木送還のために日本政
局にもっと強力に要求する必要がある」と主張した。

ペ・オソク弁護士は「この事件は侮辱罪と名誉毀損罪が成立する。しかし、現実的に鈴木に対する
処罰は容易ではなく、日本軍慰安婦被害者を侮辱するテロ・犯罪行為をこれ以上繰り返えさせな
いように国内はもちろん国際社会に知らせて警告する意味が大きい」と明らかにした。

日本軍慰安婦被害ハルモニらの法律代理人のキム・カンウォン弁護士も「過去に類似の行動をし
た人が再び被害者を侮辱する郵便物を送った。日本に行って鈴木を捕まえることができず、現実
的に難しい側面がある。単純に法的制裁を論じるより、こうしたことが再発しないように懲らしめて、
警告する意味がある」と説明した。

ナヌムの家関係者も「被害当事者のハルモニたちが同じ懸案で二回も侮辱されくやしがっている」
として「刑事処罰の実効を得られないとしても私たちの司法当局はこのように捜査して処罰を決め
たという内容等を記録に残さなければならない点で法的に対応したもの」と明らかにした。

ソース:KBSニュース(韓国語) ‘再び蛮行’日本人鈴木処罰方法は?蚯蚓φ ★@\(^o^)/訳

http://megalodon.jp/2015-0524-1741-01/awabi.2ch.sc/test/read.cgi/news4plus/1432447829/

‘또 다시 만행’ 일본인 스즈키 처벌 방법은?

상자 안에는 일본어로 ‘제5종 보급품’이라고 적힌 글귀와 함께 일그러진 표정으로 무릎 아래가 없는 소녀상 모형이 투명 플라스틱 원통에 담겨 있었다.

‘제5종 보급품’이란 군인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 여성을 뜻하는 용어다. 이 상자에는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적힌 말뚝 모형(높이 9cm)도 함께 있었다.

안신권 나눔의 집 소장은 “스즈키는 2012년 6월 당시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에 말뚝을 걸어 놨던 바로 그 일본인”이라고 밝혔다.

스즈키는 지난 16일 자신의 블로그에 똑같은 형태의 소녀상 모형 4개를 촬영한 사진과 함께 ‘5월 16일, 한국 위안부박물관에 관련 물품을 증정했다’는 글을 올려 자신이 한 행동임을 밝혔다.

그는 우편물을 나눔의 집뿐만 아니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도 배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위안부 피해자인 이옥선, 유희남, 박옥선, 김옥선, 김정분, 김군자 할머니 등 10명은 스즈키를 명예훼손 및 모욕 혐의로 21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안 소장과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국제평화인권센터 활동가들도 같은 혐의로 스즈키에 대한 고발장을 냈다.

■ 3년 전에도 망국적 행동한 스즈키

스즈키가 위안부 할머니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공분(公憤)을 사고 있는 이유는 3년 전에도 비슷한 테러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스즈키는 지난 2012년 6월 주한 일본 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말뚝을 설치하고 이후 두 달 뒤인 8월에도 전쟁과여성인권 박물관 입구에 똑같이 말뚝과 전단을 붙여 우리 법무부로부터 입국금지를 당했다.

스즈키는 한국에 대한 미움을 개인 블로그나 인터넷을 통해 표출하는데 그치지 않고,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외부 활동을 전개하는 전형적인 일본 우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그는 지난 2007년과 2013년에 일본 참의원 선거에도 출마해 한일 국교를 단절하고 일본의 독도 탈환과 핵무장 공약을 내걸고 우익 인사들의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 스즈키에 대한 처벌은

스즈키는 2012년 6월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 소녀상에 이른바 ‘다케시마 말뚝’을 묶고 위안부를 모독하는 발언을 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2013년 2월 불구속기소됐다.

하지만 6번의 재판에 한 번도 출석하지 않았던 그에 대해 법원이 지난해 6월30일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검찰에 지명수배를 의뢰했다. 발부된 구속영장의 유효기간은 다음 달 30일까지다.

당시 재판을 맡았던 서울중앙지법 형사1단독 안호봉 부장판사는 “스즈키는 2차례에 걸쳐 공소장과 소환장을 송달받고도 재판에 6차례나 불출석했다”며 “스즈키의 이런 태도를 보면 자발적으로 출석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된다”고 영장 발부 이유를 밝혔다.

이어 “송달을 2번이나 했는데도 불출석한 피고인에게 강제처분을 하지 않는다면 피고인이 대한민국의 형사재판을 무시하거나 망각할 수 있다”며 “구속영장 발부는 향후 스즈키의 대한민국 입국 시 재판 출석을 담보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조계에서는 할머니들이 이번에도 스즈키를 고소했지만, 그에 대한 신병 확보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직접적인 처벌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유일한 방법은 지난 2002년 한국과 일본이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스즈키의 신병을 한국에 넘기면 되지만 일본 정부가 응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스즈키도 말뚝 테러 이후 한국에 들어온 적이 한 번도 없어 현재로서는 일본 정부의 결단이 없다면 그를 한국 법정에 세우기는 어려워 보인다.

지난번 고소 후 우리 법무부는 법원에서 보낸 소환장 등 서류를 양국 외교라인을 거쳐 일본 법무성과 스즈키에게 전달했고 이후 송달보고서를 통해 스즈키가 공소장, 소환장 등을 수취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매번 ‘송달 불능’을 이유로 공판이 연기되면서 법조계에서는 결국 일본 사법 당국이 송달보고서를 보내지 않는 등 스즈키를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국회 관계자는 “일본의 우경화가 거세 지면서 일본 당국이 범죄인 인도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우리 정부는 스즈키 송환을 위해 일본 정국에 보다 더 강력하게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배오석 변호사는 “이 사건은 모욕죄와 명예훼손죄가 성립된다”며 “그러나 현실적으로 스즈키에 대한 처벌은 쉽지 않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모욕하는 테러·범죄행위를 더는 반복하지 못하도록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에 알려 경고하는 의미가 큰 것 같다”고 밝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법률대리인인 김강원 변호사도 “과거에 유사한 행동을 했던 사람이 또다시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우편물을 보냈다”며 “일본에 가서 스즈키를 붙잡아 올 수 없어 현실적으로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단순히 법적 제재를 논하기보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응징하고, 경고하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나눔의 집 관계자도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이 같은 사안으로 두 번이나 모욕을 당해 억울해 하고 있다”며 “형사처벌의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 해도 우리 사법당국은 이렇게 수사하고 처벌을 결정했다는 내용 등을 담아 기록에 남겨야 한다는 점에서 법적 대응한 것”이라고 밝혔다.

https://archive.is/Jx3nP

http://megalodon.jp/2015-0524-1742-38/news.kbs.co.kr/news/NewsView.do?SEARCH_NEWS_CODE=3081595

兵役逃れ歌手ユ・スンジュン「チャンスがほしい」 —

兵役逃れ歌手ユ・スンジュン「チャンスがほしい」

入国禁止ユ・スンジュン「韓国の地を踏めるようチャンスほしい」と訴える

兵役逃れで韓国への入国を禁止されている歌手ユ・スンジュンが、兵務庁側に「どうにかチャンスがほしい」と訴えた。

ユ・スンジュンは19日午後、インターネット放送「アフリカTV」で兵務庁に「どんな方法でもいいから善処していただき、韓国の地を踏めるようにチャンスがほしい」と訴えた。

続け「再び子どもたちと共に韓国の地を踏めるよう善処してくださったらうれしい。その方法がどうなろうと、僕が幼い時に下した全てのことに対して謝罪する」と謝罪の意を伝えた。

「米国市民権を放棄し、韓国国籍を持って韓国に入る代わりに軍服務につ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なら、そうするつもりがあるか? 」という質問に、ユ・スンジュンは「そのつもりだ。そうやって善処してくださればうれしい」と答えた。

また韓国国民に対して「もっと早く出てくるべきだったし、もっと早く謝罪するべきだった。勇気がなく、簡単には出て来られなかった。遅くなって皆さんに謝罪することを本当に申し訳なく思う。どんな方法を使ってでも韓国に帰りたい」と謝罪した。

歌手ユ・スンジュンは90年代後半に活発な歌手活動を展開していた当時、大衆の前で入隊の決意を約束した。これに関して彼は「美しい青年」という愛称を得て多くの国民から愛され、兵務庁の配慮から海外活動までおこなった。しかし2002年、入隊3か月前に米国に渡って市民権を取得し、韓国への入国禁止措置を受けた。これは、これは出入国管理法11条「大韓民国の利益や公共の安全を害する行動をする心配があると認めるほどの、相当な理由がある人間に対して、入国禁止措置を下すことができる」という条項によってのことだった。

この日の放送はインターネット「アフリカTV」を通じて香港から全世界に生中継され、現地中継を担当したシン・ヒョンウォンプロダクションの代表シン・ヒョンウォン氏は「録画にしようとしたら、スンジュンさんが伝えたいことの意味が編集によって歪曲してしまう可能性を恐れたため、編集のない生中継を決定した」と伝えた。

2015/05/20 wowkorea

http://megalodon.jp/2015-0524-1022-08/s.wowkorea.jp/news/Newsread.asp?nArticleID=144900

https://web.archive.org/web/20150524012301/http://s.wowkorea.jp/news/Newsread.asp?nArticleID=144900

世界遺産登録、強制徴用を反映するべき —

世界遺産登録、強制徴用を反映するべき

「日本の世界遺産登録、強制徴用を反映するべき」

日本近代産業施設のユネスコ世界文化遺産登録推進に関連し、韓国政府は22日、朝鮮人強制徴用の事実を反映するべきだと日本政府に要求したが、日本は受け入れがたいと述べ、隔たりを狭め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世界遺産に登録されるかどうかは6月28日-7月8日にドイツ・ボンで開催される第39回世界遺産委員会で決定される。

2015年05月23日中央日報日本語版

http://www.webcitation.org/6YkiTlidD

https://web.archive.org/web/20150524005741/http://japanese.joins.com/article/827/200827.html?servcode=A00&sectcode=A10&cloc=jp|main|top_news

日本の歴史研究16団体、声明発表へ —

日本の歴史研究16団体、声明発表へ

慰安婦:日本の歴史研究16団体、今月25日に声明発表へ

慰安婦問題の歪曲に反対

歴史学研究会など、日本の歴史研究関連の16団体が、今月25日に東京で記者会見を行い、「旧日本軍の慰安婦問題に関する日本の歴史学会・歴史教育者団体声明」を発表する予定だ、と20日発表した。

16団体は報道資料を通じ「慰安婦問題について、日本の歴史学会および歴史教育団体の意見を発表するため、半年近くにわたって準備を進めてきた」と説明した。その上で「旧日本軍が慰安婦の強制連行に深く関与したことは間違いのない事実だ」という内容を含め、歴史学や歴史教育の関係者たちの統一見解を発表する方針だ。

また16団体は「今回の声明を基礎として議論を発展させ、同時に歴史的な事実に基づかない発言によって(韓日両国の間に)不必要な誤解が生じることがなくなることを期待する」と主張した。

東京=ヤン・ジヘ特派員

朝鮮日報/朝鮮日報日本語版 2015/05/21

http://megalodon.jp/2015-0524-0946-51/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5/05/21/2015052100737.html

https://web.archive.org/web/20150523141017/http://www.chosunonline.com/site/data/html_dir/2015/05/21/2015052100737.html

バンドン会議・安倍・韓国 —

バンドン会議・安倍・韓国

誤解・思い込み…特異な韓国 ソウル・黒田勝弘

先にインドネシアで「バンドン会議60周年記念」の国際会議が開かれ安倍晋三首相が演説した。バンドン会議は第二次世界大戦後に独立したアジア・アフリカ諸国が反植民地主義や民族自決、世界平和などを掲げ1955年に開催した。インドネシアのスカルノ大統領、インドのネール首相、中国の周恩来首相、エジプトのナセル大統領が中心となり後の非同盟運動のきっかけになった。

日本は60年前の会議にも招かれた縁があり今回、安倍首相が出席したが、韓国人にはこれが理解できなかったらしい。「日本は侵略国で韓国を支配した植民地主義の国だったはずなのに」というわけだ。

知り合いの韓国マスコミのOBも首をかしげていたので「いや、東南アジアや中東、アフリカ諸国には、日本はアジアが欧州の植民地支配から解放されるきっかけを作ったと評価する声があるからだ」と説明したところ驚いた表情で「そんなはずはないだろう」という。

「日本はアジアを侵略、占領した」というので「いや日本による占領は数年間で、アジア諸国にとっては欧州諸国による長期の植民地支配から解放されたことの方がはるかに重要だったからだ」と重ねて説明したが最後まで認めようとしなかった。

知識人に属する韓国人でもこの程度なので、多くの韓国人は「日本は今もアジアの国から恨まれている」と誤解し思い込んでいる。韓国が「アジア」というときは、イコール韓国と中国ということでほかの国は視野に入っていないのだ。

いつもジコチュウで視野が狭いため、バンドン会議60周年会議で安倍首相の演説に過去の歴史に対し反省だけがあって謝罪が入っていないと批判したのは、参加もしていない韓国だけだった。

先に日本の外務省が戦後日本の対外協力の実績を紹介した映像の広報資料を発表したときも、韓国だけがデタラメだといって非難している。とくに韓国のことを取り上げたわけでもないのに映像の一部に韓国の製鉄所や地下鉄、ダムなどの写真が入っているのを見て韓国だけが反発した。

さすがに政府は何も言わなかったが、マスコミは準国営のKBSテレビや最大手の朝鮮日報が先頭に立って「韓国の経済発展は日本のおかげとはとんでもない!」「妄言だ!」と意地になって日本を非難した。

アジアの他の国は何も言っていない。しかも実際は韓国が経済・技術援助をはじめ最も日本の影響を受けて発展したことは国際的には常識なのだ。

韓国政府が日本との国交正常化(1965年)の際に、過去の支配に対する補償として受け取った対日請求権資金5億ドルだって、韓国の経済発展の基礎になったことは韓国政府発行の『請求権資金白書』(76年刊)に詳述されている。国交正常化50周年の今年、記念事業としてこの白書を日韓双方で復刻出版してはどうか。

ことほど左様に韓国はアジアできわめて特異な国なのだ。18日にはインドのモディ首相が韓国を訪問するが、朴槿恵(パク・クネ)大統領はモディ首相と歴史談議をしてみてはどうだろう。インドは100年近く英国に植民地支配されたが「おたくの謝罪・反省・補償要求はどうなってますか?」と聞いてみればいい。今、世界で韓国だけが歴史にこだわった外交をしていることが分かるだろう。

2015.5.16 産経・黒田

https://web.archive.org/web/20150516024530/http://www.sankei.com/column/news/150516/clm1505160006-n1.html

https://web.archive.org/web/20150516082330/http://www.sankei.com/column/news/150516/clm1505160006-n2.html

https://web.archive.org/web/20150516082447/http://www.sankei.com/column/news/150516/clm1505160006-n3.html

raw 韓国国会連帯会議歓迎夕食会 이자스민 의원, 제13차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 환영만찬 참석 —

raw 韓国国会連帯会議歓迎夕食会 이자스민 의원, 제13차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 환영만찬 참석

이자스민 의원, 제13차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 환영만찬 참석

– 종전70주년,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와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

[KoreaNews/독고상엽 기자] 지난 21일 이자스민 의원(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여성가족위원회)은 국회 사랑재에서 열린 ‘제13차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 환영만찬’에 참석하여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번 환영만찬에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하상숙, 이용수,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와 필리핀에서 온 에스테리타 바스바뇨 디, 피덴시아 데이비드 할머니가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었으며, 일본, 대만, 필리핀, 미국, 중국, 동티모르 등 각국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아시아연대회의 여러 활동가들이 참석하였다. 만찬 후에는 할머니들의 노래와 시 낭송이 이어졌고, 각국 활동가들이 노래와 율동 등 작은 공연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응원했으며 마지막 무렵에는 만찬장의 모든 참석자가 일어나 손에 손을 잡고 함께 아리랑을 불러 감동을 더했다.
이자스민의원은 “우리 할머님들이 바라는 건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입니다. 벌써 13년째 수요집회가 매주 열리고 있습니다. 저도 몇 차례 참석했었지만, 매번 우리 할머님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합니다. 계속 건강하셔야 하는데…..”라고 안타까워하면서,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며, 두 나라만의 외교 문제도 아닙니다. 현재 진행형이며, 인류 보편의 인권 문제입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인권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전시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에 관한 문제로 국제사회에 계속 알려야 합니다.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전 세계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종식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국회여성가족위원회 일본군위안부문제대책 소위원회 위원으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며 종전 70주년을 맞이하여 올해는 위안부 문제해결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의 환영식이 국회에서 열린 것은 아시아연대회의가 결성된 이후 최초이다. 한편 이날 국회에서는 이자스민의원뿐만 아니라 정의화 국회의장, 유승희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장, 황인자 의원, 류지영 의원 등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2015.05.23

http://megalodon.jp/2015-0524-0626-20/m.dhn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496

https://web.archive.org/web/20150523212624/http://m.dhn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496

raw 慰安婦 第5種補給品像で告訴 위안부 피해 할머니, ‘위안부 모욕’ 日 극우인사 검찰에 고소 —

raw 慰安婦 第5種補給品像で告訴 위안부 피해 할머니, ‘위안부 모욕’ 日 극우인사 검찰에 고소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위안부를 모욕하는 소녀상 모형을 보낸 일본 극우인사를 21일 검찰에 고소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89) 할머니 등 10명은 이날 일본 극우인사 스즈키 노부유키(鈴木信行·50)를 명예훼손 및 모욕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스즈키는 지난 19일 위안부 피해자를 모욕하는 물건이 담긴 소포를 경기도 광주의 위안부 피해자 쉼터 ‘나눔의 집’에 보냈다.

소포 안에는 일본어·영어로 ‘날조 금지’가 쓰인 종이 상자 안에 ‘제5종 보급품’ 표시와 함께 일그러진 표정에 무릎 아래가 없는 높이 12㎝ 정도의 위안부 소녀상 모형이 들어 있었다. ‘제5종 보급품’은 군인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 여성을 뜻하는 은어다. 일본어로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적힌 9㎝ 길이의 말뚝 모형도 보냈다.

앞서 스즈키는 212년 6월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에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라 적힌 말뚝을 묶고 위안부를 모독하는 발언을 해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지난해 우리 법원에 의해 구속영장이 발부됐지만 그가 일본에 있어 사법 절차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안신권 나눔의 집 소장은 “이번만큼은 한국정부가 범죄인인도조약을 강력히 주장해 스즈키가 한국 사법당국에서 조사받을 수 있도록 최선의 외교적 노력을 다해달라”고 호소했다.

2015.5.21 朝鮮日報

https://web.archive.org/web/20150523203035/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5/21/2015052102787.html